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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민간병원 의학박물관

국방타마마 2017. 4. 7. 10:13

 

수술비의 1/10 만 받은 배려를 해준 병원측에

34년만에 나머지 금액을 갚은 사연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주에 있는 예수병원이 그 주인공으로

 

전국 민간 의료기관중 최초로 전문 박물관

등록을 한 의학 박물관이 예수병원

부설주차장에 있습니다!

 

예수병원하면 1대 병원장 마티 잉골드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데요~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이례적으로 이론과 실기 모두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의 인재였던 마티 잉골드

 

역사가 무려 119년에 이르는 예수병원은

1898년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의료사역을 위해

전주를 오면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말을 타고 왕진 나가는 마티 잉골드

 

당시는 동학 혁명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때로

유교문화에 따라 여성이 남성을 만질수 없었기에

초기 진료는 어린이나 여성이 주가 되었다네요.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한방 의학을

제외하면 대다수 백성들은 무당이나 민간요법에

의존할 만큼의 열악한 의료상황

 

서양에서 가져온 이상한 가루약을 먹지 않거나

며칠치를 한번에 먹어버리는 경우도

속출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보다

예수병원의 역사가 조금 늦을뿐이라니

얼마나 오래전인지 알법도 하더군요.

 

 

 

마티 잉골드 일기 中

 

12월 12일

병들어 죽어가는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 집 귀신이

노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1월 12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환자에게 좀 더 크게 말해달라 했더니

귀신이 들으면 병이 더 악화된다고 두려워했다.

 

3월 22일

여덟명의 아이가 죽은 집에서 귀신을 잡아 병에 넣고

묻은 후로는 아이가 아프지 않고 잘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대 병원장들이 거쳐가며 실제로 사용했던

의료 기기들은 한국 근대의학의 역사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 입니다.

 

그럼 저와 같이 구경해 보실까요?

 

 

 

60년대 현미경(좌측)을 보니 의료용이라기 보단

학교 실습용으로 보일만큼 단순한

모양새를 하고 있군요.

 

 

 

80, 90년대 현미경의 모습을 보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시나요?

 

 

 

 

지금도 병원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는 청진기

 

청진기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크게

들려 주는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이 내는 소리가 만든 진동수가

청진기의 떨림판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나는 소리를 듣는 원리라고 합니다.

 

 

 

왕진을 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환자를 즉석에서

치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상황

 

의료시스템이 열악하던 시절이니 고름을 짜내거나

소독하는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았다네요.

 

 

 

1970년대 사용하던 심장 박동조율기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일때 전기자극을 주어서

정상으로 되돌리는 장치인데 말타고 왕진 나가는

사진을 보다 이걸 보니 또 뭔가 첨단의 느낌이군요 ㅎㅎ

 

 

 

경우에 따라선 전자식으로 부풀어 측정하는

장비보단 이런 예전 방식의 정확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관람하다보면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드는 유물들도 적지 않았어요.

 

 

 

안경을 맞추기전 여러 렌즈를 번갈아 써서

테스트 하는 장비는 지금도 쓰는 것이지만

특유의 엔틱한 분위기가 새로웠습니다.

 

렌즈 종류가 많아 보이는건 한번에

한 렌즈씩만 끼워볼수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의로 쓰이는 시력표

 

우리나라는 1951년 시력표가 개발되었지만

측정방법에 대해선 표준이 없다가 2006년도에서야

KS 규격으로 정해졌다네요.

 

 

 

70년대 안과에서 렌즈의 도수를 측정할때

쓰이는 장비로 이름은 렌소메터 입니다.

 

 

 

청력테스트도 한번씩 해보셨죠?

삐삐~ 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면서 테스트를 하죠.

 

 

 

안과용 수술도구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군요.

 

예수병원하면 119년에 이르는 전통답게 한국

최초의 타이틀이 많은 병원이기도 합니다.

 

 

 

그중에 1964년 어린 소녀의 목숨을

앗아간 한 사건이 눈에 띄더군요.

 

 

 

복통을 호소하며 찾아온 9살 여아 몸속에

기생충 1063 마리가 나왔고 아이는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20kg 이던 아이 몸속에서 5kg 의 기생충이

나왔으니 몸무게의 1/4 를 차지할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였죠.

 

 

 

큰 충격을 받은 구바울 병원장은 대대적인

기생충 퇴치 운동을 정부에 건의 하고 이것이

받아드려져 25년만에 기생충 감염률이

95%에서 3%로 떨어지게 되었어요.

 

우리가 어릴적 채변 봉투를 가지고 왔던것도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기생출 퇴치운동의

일환 이였던 것이죠.

 

어떤 아이는 변이 나오지 않아 동네 강아지변을

담아 왔다가 검사결과가 난리 나는

웃지 못할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

 

 

 

 

이것은 위 내시경 장비라는데 그 모양새만 보고

상상을 해보자면 조금 무섭기도 하군요.

 

위에서 발견된 이물질중 1위는...

 

 

 

동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ㅇ-;;

아무튼 내시경 기술은 계속 발전을 하게 되어..

 

 

 

광섬유다발을 이용한 연성내시경이 발명되었어요.

 

현재까지도 소화기 내시경으로 대부분 사용하는

장비가 바로 이 파이버스코프 입니다.

 

 

 

 

이것도 내시경 장비인데 어떤 용도 인지 아시겠어요?

 

방광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요도 와 방광을

보는 장비로 종양이나 방광염을 진찰한다고 하네요.

 

 

 

 

선진 의료기술을 갖춘 예수병원은 입소문이 나서

항상 환자들로 복도까지 가득차 있었는데요.

 

전주 시내지역 위생도 좋지 않을때였지만

 

왕진차 다녀온 인근 지역 위생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바쁜 와중에도 영사기를 들고

위생 교육을 나섰다고 합니다.

 

 

 

왕진후 사소한 내용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

 

완주군의 실태를 조사해 보니 50% 이상이 18세

이전에 결혼을 하고 57% 이상이 배설물로

오염된 식수를 마실만큼 열악한 환경이였고..

 

 

 

이를 두고볼수 없었기에 무의촌이던 완주군

고산면에 고산 분원을 세우게 되었어요.

 

고산분원은 개인 의원이 시골까지 진출하기

전까지 지역 주민들의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하다가 2006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병원의 설립자 마리 잉골드가 실제 입었던

브라우스 와 구두

 

배를 4개월이나 타고 와야 할만큼 멀고 낯설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 의료봉사를 올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지더군요.

 

 

 

이 장비는 한국 암치료에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설대위 원장이 종양 환자를

치료할때 쓰던 방사선 심부치료기 입니다.

 

 

 

저는 두 장비가 이어진건줄 알았는데 좌측은

환자를 진료할때 쓰는 의자이고 오른쪽은

환자의 근력을 측정할때 쓰는 장비였어요.

 

 

 

피부를 이식을 위해 표피를 박리하는 도구

 

박리는 벗겨낸다는 뜻으로 무섭기도 하지만

피부 이식을 위해선 빠질수 없는 과정이였겠죠.

 

 

 

한눈에 보기에 그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장비들도 많았는데요.

 

 

 

우측 장비는 안과 진료 사진이 붙어 있어서

바로 알수 있었는데 좌측에 작은건 약제과 타정기로

70년에 알약을 찍어내는 장비라고 설명이 있었고요.

 

 

 

어디보자... 이건 뭘까요..


 

치과용 장비로군요. 그러고 보니 저기 물이 나오는

부분이 요즘 장비와 비슷하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건 절대 못맞추실겁니다..

 

병원보다는 어디 공업사에서 쓰는 장비

같기도 한 이것의 정체는 약제과 믹서기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물약을 섞어서 제조하는

기구라니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시겠죠?

 

 

 

출산 경험이 있거나 목격하신 분들이라면

상상한것보다 크고 힘차게 울리는 태아 심장

소리에 놀라신적이 분명 있을겁니다. ^^

 

 

 

휴대용 마취기를 보니 야외에서 응급수술을

하는 상황이 지금보다 많았을거라는 추측을

해보게 되네요.

 

 

 

1950년대 사용하던 왕진가방

 

 

 

1970년대에 지역단위 의료 보험을 만들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이루어낸 분이 권익수 선교사로

한국분 같지만 외국 선교사의

한국식 이름이에요.

 

국가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된때는 1989년

이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플라스틱 카드가 보편화 되기 전엔

중요한 면허나 진찰권등은 저렇게

만들어 썼던 기억이 어렴풋 나네요.

 

 

 

몇 번 신축을 했던 예수병원이지만 늘어나는

의료진수 보다 환자수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바울 원장이 미국과 독일을 넘나들며

헌금을 모금하고 지원금을 받아 신축한

곳이 바로 지금 용머리고개에 위치한 

예수병원 자리 입니다.

 

 

 

독일에서 500만 마르크(당시 화폐단위)

미국 헌금 모금으로 50만 달러

독일 EZE로 부터 125만 달러 등등

 

여러 지원에도 5층 공사비가 부족하여

다시 모금운동을 벌이는 우여곡절끝에

 

 완공된 예수병원은 당시 한강 이남으로썬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있고 라지에이터로

난방을 하는 최신식 건물이였다네요.

 

 

 

마지막으로 보여드릴 기기는 심장 전기충격기 입니다.

하단에 검은색의 큰 장비가 60년대 것이고

 

그 위에 작은 장비가 80년대 전기충격기라니

많은 발전이 느껴지네요.

 

 

 

마리 잉골드가 전주의 어느 작은 집(상단 사진)

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시작된 예수병원

 

그 집의 위치는 전주 한옥마을 인근

남부시장 맞은편 완산초등학교 자리였어요.

 

그리고 지금의 용머리고개 예수병원까지

오면서 역대 선교사 병원장들은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의료 기술 향상에 획기적사건이라 평가 받는

수련의 제도 도입은 물론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라 여기고 국가에 건의하여

퍼지게된 보건소 사업 뿐만 아니라

 

기생충 박멸 운동

암등록 사업

국가보다 앞선 민간의료보험

X-RAY 장비 도입

간호과정 교본 제작

사지마비환자 수부 재건술

외국인 무료진료센터

 

그리고 제가 다녀온 의학 박물관 등등

 

한국 최초의 타이틀이 많은

비영리 민간병원인 예수병원

 

최근엔 재활 의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재활의학 병동을 신설하였는데

국가의 지원도 없이 수익성이 좋지 않은

재활의학을 모른척 하지 않았던 이유는

 

새벽 2시에도 응급환자를 위해

뛰어서 수술방에 들어가 집도 하고

월급도 받지 않은채 선교사비로만

검소하게 생활했던

 

역대 선교사 병원장들의 헌신이

이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1600여 명에 이르는 외래환자를 진료하며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받은 금액은 약 30달러로

이마저도 약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을까

걱정해서 받은 금액이라고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